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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로맨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3) : 담담하게 그린 죽음과 로맨스

1. 영화정보

8월의 크리스마스
개봉 : 1998.01.24
등급 : 15세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97분
평점 : 9.31

멜로 장인 허준호 감독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제목처럼 죽음을 앞둔 한 남자에게 한여름 8월에 다가온 그녀와의 짧은 사랑과 추억을 그리는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영화였다

* 시청가능 OTT : 넷플릭스 , 왓챠

2. 줄거리

"좋아하는 남자 친구 없어요?"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을 만나게 되고 차츰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저씨, 왜 나만 보면 웃어요?" 밝고 씩씩하지만 무료한 일상에 지쳐가던 스무 살 주차 단속요원 '다림'. 단속차량 사진의 필름을 맡기기 위해 드나들던 사진관의 주인 '정원'에게 어느새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3. 등장인물

정원 (한석규)

정원은 시한부 인생이다. 여느 시한부 인생 주인공과 달리 곧 죽을 운명이지만,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어린시절부터 죽음을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어머니의 여읜 탓에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온 정원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에도 태연하다.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며 온화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그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만취 상태로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흐느끼는 두 장면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전부다. 죽음마저 초월한 그는 웬만한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림을 알게 되면서 달라진다.

다림 (심은하)

다림이 일 때문에 초원사진관을 자주 찾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의 마음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초원사진관은 자주 문이 닫힌다. 정원이 검진을 받으러 갈 때는 ‘출장 중’이라는 푯말이 걸리고 갑자기 쓰러져 입원한 동안에는 장기간 비워진다. 그럼에도 다림은 하염없이 편지를 쓰며 정원을 기다린다. 다림의 성씨는 ‘기’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기다림.

4. 명대사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5. 리뷰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내가 초등학생 때 개봉한 영화다. 성인이 된 후에 한번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여름이 다 지나 가을의 대목에서 이 영화를 보게되었다.

수채화같은 영화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죽음과 사랑을 그려낸 방식이 오랜 시간동안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던 영화였다. 정원의 독백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의 긴 테이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를 보며 느껴지는 잔잔함이  그 시절의 감성이 그리워지는 영화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는 정원의 독백에 울림을 느꼈다. 삶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환경은 변한다. 점점 퇴색되어간다는 표현이 어울릴텐데, 사라지는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으로 순간을 기록하곤 한다.



이 영화가 죽음을 담담하게 그려냈다고 느낀 장면은 정원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을 기억해줄 이들을 위해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다. 친구들과 한껏 폼을 잡은 채 한 컷, 활짝 웃는 다림의 사진 한 컷, 그리고 자신의 영정사진까지. 정원이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 모습은 가족사진을 찍은 며칠 뒤 홀로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초원사진관을 찾는 할머니의 장면과 함께 애처롭다.

이 장면이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죽음을 대비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은 할머니의 표정과 죽음을 대비하고 남은 자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밝은 모습으로 다시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학창시절의 사랑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마음 속에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기는 정원의 모습에서 남겨진 이들에게 슬픔이라는 마음의 짐을 덜게 함이 아니었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사진과 더불어 편지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정원을 기다리며 다림은 편지를 쓰고, 정원은 다림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를 쓴다. 홀로 남겨질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 기기 작동법 순서를 남기는 모습이 나온다.

편지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수신인이 눈 앞에 없는 부재의 상태에서 기록하는데, 보이지 않는 상대를 떠올리고 그를 향한 마음을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편지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자 그리움과 낭만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이 <즐거운 편지> 였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 듯, 황동규 시인의 첫 시집 <어느 개인 날>에 실린 동명의 시 제목을 옮기려 했으나 1997년 개봉된 영화 <편지>를 감안해 지금 제목 <8월의 크리스마스>로 바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정원에게 다림의 존재가 8월에 나타난 선물같은 존재일 수 있고,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죽게되는 정원의 8월을 의미하는 것 같은 중의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어서 좋다.

담담하게 표현한 삶과 죽음, 90년대 아날로그 감성으로 그려낸 사랑이 굉장히 아련해 여운이 길게 남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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